• 나는 미국의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던 시절 내내 디자인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나는 그것이 잘못됐다고 믿는다)에 맞서 싸워야 했다. 같이 일하는 프로듀서들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말하곤 했다. "아직 내용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시간이 너무 촉박하니까 디자인부터 시작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적어도 그 사람들은 수년간 크리에이티브 업계에 몸 담아 온 사람들이다. 하물며 전혀 다른 분야의 사람들은 어떠하랴. 한국의 상황도 미국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 p.180

 

  • 한국과 미국,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나타나고 있는 디자인 업계의 이원화는 전문 영역으로서의 디자인계가 직면한 심각한 위기 상황이다. 디자이너가 믿고 있는 자신의 역할과 사상이 사회의 보편적인 공감을 얻지 못할 때 그들이 설 자리는 매우 좁다. 지금 디자인 업계의 상황이 정확히 그러하다. 객관적인 수치로서의 일자리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지만, 지금 대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이 갈고닦은 이론과 방법대로 계속해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는 극히 적다는 사실이 가장 큰 증거다. - p.181

 

  •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래픽디자인이라는 문화의 팬이 되어 관심을 가지고 기여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다. 소규모 출판을 전제로 한 인디 잡지라든지, 아트북, 디자인 블로그, 각종 인터넷 사이트의 스킨 제작 등이 모두 이에 포함된다. 이런 활동의 유연함과 언더그라운드적 성향에 매료되어 실제로 많은 프로페셔널 그래픽디자이너가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독자적인 문화로서의 디자인은 결국 주류 디자인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p.182사람들이 그래픽디자인에 매료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예술과는 달리 실용적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픽디자인이라는 분야가 주류 사회에서 담당하는 역할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다면 이러한 하위 문화의 존재 이유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 p.183

 

  • 하고 싶은 대로 하지만 사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디자인. 누구나 매일 보고 사용하지만 디자이너의 생각은 눈물만큼도 들어가 있지 않은 디자인. 그래픽디자이너는 이런 두 세계 사이에서 괴리감을 안고 살아간다. 매우 유감스러운 상황이다. 언제쯤 디자이너들의 이상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때가 올까. 사실 지금까지 그렇게 나쁘게 진행되어 왔다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최소한 디자이너들은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수많은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다. 많은 뜻 있는 디자이너들이 지금까지 외부의 현실을 개조하는 것에 힘을 써왔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이상적인 디자인에 대한 내부의 잘못된 인식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진정으로 훌륭한 디자인은 누구에 의해서든,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어떤 스타일을 적용시켜서든 탄생할 수 있다. 단, 그것이 디자인이라는 전제 아래에서 말이다. - p.184

 


  • 디자이너는 직업적 본질과 동떨어진 일에 얽매여 도덕성에 큰 상처를 입은 채로 살아간다. 거짓말쟁이 기업의 대변인 역할을 하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다. 머리와 손이 따로 노는 정부의 지시를 받으며 좌절을 느낀다. 이 모든 것은 디자이너가 자기 자신의 믿음을 세우지 못한  채 외부의 지시에만 의존해 작업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힘들겠지만 우리는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찾는 험난한 여정을 거쳐야 한다. "무엇이 좋은 디자인인가"라는 질문에 시크하고 쿨한 태도를 버리고 열정적이고 직설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 p.243

  • 지금까지의 말을 기업과 정부의 일을 거절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면, 당신은 요점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내가 당부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그 반대다. 디자이너는 각박하고 혼란스러운 디자인 산업의 현실을 피해 안전한 갤러리에서의 작품 활동으로 도망치는 대신, 사회 속의 실질적인 일에 더 많이 부딪치며 끊임없이 본인의 디자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중에는 기업의 광고도 있고 정부의 환경 미화 사업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하든지 내가 하고 싶은 디자인, 내가 좋다고 믿는 방식을 실행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디자이너는 뚜렷한 믿음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 믿음을 협력자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해져야 한다. - p.244

  • 진심으로 몰입할 줄 아는 디자이너는 디자인 외의 모든 문제에 초연하다. 하고 싶은 바가 확실한 디자이너는 지위나 연봉을 신경 쓰지 않는다. 다른 이들의 평가와 수상 실적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다. 디자인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삶의 의미를 찾을 줄 안다. 당신이 지금 그런 과정을 걷고 있지 않다면, 지금 당장 본인이 하는 일에 대해 심각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물론 내가 원하는 바가 확실하다고 해서, 뚜렷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온갖 황당한 상황이 닥쳐 모든 걸 망쳐 버리는 경우가 숱하게 많다. 일이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자책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원하는 바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생각을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가다듬으며 일상의 디자인을 수행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믿는 바를 실현할 기회가 온다. 주변 사람들이 당신이 생각하는 존재란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할 때, 그런 당신과 함께 일하고 싶다고 느끼기 시작할 때 그런 기회는 반드시 찾아온다. 당신이 기업에 있건, 관공서에 있건, 학교에 있건, 미국에 있건, 네덜란드에 있건 간에 상관없이 말이다. - p.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