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 기반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맡기 싫은 일을 거절할 수 없고 주체성을 지키기도 어렵다. 금전적으로 자립하지 않은 디자이너는 무리한 의뢰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에 자주 처한다. 당시 계산으로는 연간 10억 엔 정도는 벌어야 자유롭게 일할 수 있을 듯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터무니없는 금액' 이지만, 실제 구조에 대해서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만들어도 10만 엔을 벌었다고 말하는 정도의 표준적인 일러스트레이션 작업 방식으로는 자유를 얻을 수 없을 테니까."


p.61 <독립한 디자이너의 개성>




"논리와 스토리는 너무 자주 사용하면 가치가 떨어진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조합하고 설계하다가 더는 나올 게 없어진다. '스토리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머리로 조합한 논리적인 스토리가 아닌 일종의 시처럼 직접 정서에 호소하게 된다. 이를테면 좋아하는 이에게 수없이 편지를 쓰고 이벤트에 초대해 감정을 전하던 사람이 더는 방법이 없자 마지막 수단을 쓰듯이 말이다. 직접 만나서 '좋아한다'고 말하고 상대방도 그 고백에 마음이 움직이게 되는 원시적인 소통 방식이다."


p.83 <디자이너와 스토리의 관계>




"하지만 차이가 없다고 독창성도 없느냐고 물으면 또 그렇지도 않다. 이를테면 내가 나로 존재하는 이유는 차이와는 다른 독창성이다. 독창성에는 '차이'와 '실존'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이 둘을 양자택일하지 않고 하나로 볼 수는 없을까? 차이에 주목해 그 질이 향상되는 방법을 '레버리지', 실존에 주목해 그 질을 높여가는 방법을 '이퀄리티'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p.85 <양극에서 균형잡기>




"나는 데생은 물론 북 디자인과 광고 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을 포함해 지금까지 해온 전반적인 작업을 다 '그림'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다행히 그림 실력은 점점 좋아지고 있다. 젊었을 때가 더 나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림에는 지식과 사고의 양이 반영된다. 그러므로 묘사하는 능력은 스무 살 때와 별반 다르지 않지만 그림 자체는 전보다 좋아졌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p.111 <그림과 디자인을 성숙시킨다는 것>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정체기는 누구에게나 있다. 특히 일할 때 오는 슬럼프는 예측 불가능한 랜덤 신호와 같다. 0과 1 중에서 어느 쪽으로 보내올지 알 수 없는 랜덤 신호에는 규칙성이 없다는 규칙성이 있다. 그러므로 슬럼프가 와도 어떻게 빠져나올지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0이 계속되고 있는 상태라고 인식하고 1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카드를 꺼내 들고 승부를 계속한다.


슬럼프에 빠지면 무조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선에서 가장 안정된 방법으로 일을 진행한다. 새로운 문맥을 파헤치는 야심은 접어두고 절대로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서 확실하고 안전한 방식으로 완성한다. 내 손에 든 카드에만 초점을 맞추고 표현에 대한 무리한 욕심은 무시하며 가는 것이다. 어차피 발상이란 뇌의 전기신호에서 비롯된 것일 테니 언젠가는 1이 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일을 계속한다. 지금까지 이렇게 해서 슬럼프에서 벗어나지 못한 적은 없다. 역시 발상을 '기다리는' 과정은 디자인이라는 일에서 빠질 수 없는 일인지 모른다."


"그런데 실무를 하며 움직일 수 없는 곳에서도 한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확실한 미션이 주어지고 스스로 할 수 잇는 일을 하나씩 쌓아가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홈런을 치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하지만, 눈앞에 다가오는 번트를 쳤다. '공이 이렇게 닿는구나, 홈런만 노렸지 공이 어떻게 닿는지조차 잘 몰랐어.' 이런 사실을 깨달으며 점차 홈런을 칠 수 있는 실력이 생긴 것 같다."


p.126 - p.127 <슬럼프는 랜덤 신호처럼 찾아온다>




"나는 대단한 실력을 갖췄는데도 인정받지 못하는 디자이너를 본 적이 없다. 어딘가에서 반드시 평가받을 수 있다는 점이 이 분야의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지금의 형태로 일하면서 몇 년 동안 필요한 것을 익히면 그 이후부터는 자신만의 방식을 스스로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2-3년으로는 기초적인 것을 제대로 습득하기에도 힘에 부친다. '나만의 분야'는 그보다 훨씬 뒤에 5년 혹은 10년 이상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전에 인쇄소에 정중하게 의견을 전하고 편집자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며 메일 답장을 너무 장황하거나 차갑지 않게 할 수 있는 세심한 태도를 몸에 잘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이처럼 디자인의 세계에서 필요한 전문적인 예의를 제대로 익히면 어디서든 혼자서 일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그런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어떤 일을 하든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한다."


p.199 - p.200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과 조직>




"이를테면 불안과 마주하는 방법이 있겠다. 디자인을 포함해 어떤 것을 창조하는 일은 그 사람이 안고 있는 커다란 불안을 원동력으로 한다.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오면 처음에 안고 있던 불안정함도 어느 정도 해소되는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그런 과정이 반복될수록 불안은 증폭된다. 나 역시 불안 주기에 빠진 적이 있었다. 디자인할수록 불안이 커지고 그 불안을 원동력으로 다시 디자인하면서 점점 불안을 키워갔다. 이때 교훈을 얻었다.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좋다."


p.211 <모두 같은 출발선에 서는 시대>



"'좋아하는 것'은 마치 반작용과 같습니다. '일'이라는 거센 작용으로 단련되어 어느 순간 모습을 드러내곤 합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그림을 그렸지만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내가 그린 그림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작용하는 것을 느끼면서 그 반작용으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게 되었지요."


p.215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