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 주의!>


좋은 산문을 쓰는 작업에는 세 단계가 있다. 구성을 생각하는* 음악적 단계, 조립하는 건축적 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짜 맞추는 직물적** 단계. 


*komponieren. '작곡하는'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참고로 '텍스트(Text)'는 원래 '직물'을 의미했다.



<13번지>


I. 책과 매춘부는 침대로 끌어들일 수 있다.

II. 책과 매춘부는 시간을 헷갈리게 만든다. 밤을 낮처럼, 낮을 밤처럼 지배하는 것이다.

III. 겉모습만 보고서는 책과 매춘부에게 있어서는 1분 1초가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좀더 가까운 관계에 놓이게 되면 그때서야 비로소 이 둘이 얼마나 서두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몰입하고 있는 동안 그들은 수를 센다.

IV. 책과 매춘부는 예로부터 서로에 대해 불행한 애정을 품고 있다.

V. 책과 매춘부 - 양자에게는 저마다 이들을 갈취하고 괴롭히는 남자들이 달라붙어 있다. 책에는 비평가들이.

VI. 공공건물* 안에 있는 책과 매춘부 - 학생용.

VII. 책과 매춘부 - 이들의 최후를 이전 소유자가 지켜보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책과 매춘부도 죽기 전에 모습을 감추기 십상이다.

VIII. 책과 매춘부는 지금까지의 자기 신상에 관한 이야기를 새빨간 거짓말로 꾸며내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실제로는 본인들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몇 년씩이나 '사랑 때문에' 이들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쫓아다니지만 어느 날 그저 '인생을 연구하기 위해' 얼쩡거렸던 곳에서 비만한 몸(Korpus**)이 되어 손님을 기다리고 서 있는 이들을 보게 된다.

IX. 책과 매춘부는 진열될 때 등을 보이는 것을 좋아한다.

XI. 책과 매춘부는 많은 후손을 만든다.

XII. 책과 매춘부 - "신앙심 깊은 늙은 여자도 젊었을 때는 매춘부"***. 지금 젊은이들의 필독서가 되어 있는 책 중 얼마나 많은 것이 과거에는 악평을 받았던가!

XIII. 책과 매춘부는 사람들 면전에서 [말]싸움을 벌인다.

XIV. 책과 매춘부 - 전자의 각주****가 후자에게는 양말 속의 돈.


*'공공건물'이란 통상 '창녀촌'을 의미하는 완곡한 표현. '도서관'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Korpus(여기에서는 중성 명사)에는 '작품'이라는 의미도 있다.

***독일 속담

****원어 Fußnoten의 Fuß는 '발'이며, Noten에는 '은행권'의 의미도 있다. 즉 '양말 속의 돈'이라는 말놀이.



<건설 현장>


아동용품 - 시각 교육 재료, 장난감, 책 등 - 의 제작에 대해 현학적으로 골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계몽주의 이래 교육가들이 계속해온 공론 중에서 가장 케케묵은 것 중의 하나이다. 교육가들은 심리학에 홀려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아이들의 주목을 끌고 그들이 갖고 놀 수 있는 온갖 비할 데 없는 물건들이 넘쳐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만무하다. 딱 안성맞춤인 물건들이 말이다. 아이들은 성향상 특히 사물을 다루는 방법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쫓아가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건축, 정원 일이나 가사, 재봉이나 목공에서 발생하는 쓰레기에 끌리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쓰레기로 발생한 것 중에서 아이들은 사물들의 세계가 바로 자신들에게, 자신들에게만 돌리고 있는 얼굴을 인식한다. 그것들을 이용해 아이들은 어른들의 작품을 모방하기보다 그냥 놀다가 만든 것을 통해 실로 다양한 종류의 소재 상호 간에 새로운, 비약적인 관계를 만들어낸다. 그런 식으로 그들만의 사물 세계, 커다란 사물 세계 속의 작은 사물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낸다. 특히 아동용의 무언가를 만들 생각이라면 온갖 요구 사항과 도구가 필요한 어른들의 활동 방식이 그러한 세계 속에 끼어들게 하기보다는 이처럼 작은 사물 세계의 규범들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마담 아리안느, 좌측 두번째 안뜰> 중에서


... 왜냐하면 임기응변은 미래의 정수 자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 이 순간에 진행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지각하는 것이 저 먼 미래를 예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전조, 예감, 신호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우리의 신체 조직을 물결들의 파동처럼 통과해 간다. 그것들을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이용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이다. 단, 이 두 가지는 양립할 수 없다. 비겁과 태만은 전자를 권하고, 냉정과 자유는 후자를 권하고 있다. 그러한 예언이나 경고가 간접적[수단적]인 것, 즉 말이나 이미지가 되기 전에 이미 그들이 가진 최고의 힘은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의 심신 한가운데를 꿰뚫어 우리로 하여금 그에 따라 행동하도록 -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거의 모르지만 - 강요하는 힘을 말이다. 우리가 그러한 행동을 게을리 할 때, 오직 그때에만 그러한 예언이나 경고는 해독된다. 우리는 그것을 읽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었다. 따라서 불시에 화재가 발생하거나 청천벽력 같은 부고가 전해지거나 하면 처음에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 충격 속에서도 어떤 죄의식이, 다음과 같은 막연한 질책이 떠오르게 된다. '정말 이럴 줄 몰랐니? 돌아가신 분에 대해 마지막으로 언급했을 때 그의 이름은 너의 입에서 다른 식으로 울리지 않았었니? 화재의 불꽃 속에서 어젯밤이 너에게 보낸 신호가 보이지 않니? 그날 밤이 했던 말을 너는 지금에서야 겨우 이해한 것 아니니? 그리고 네가 좋아하던 것을 잃어버리기 몇 시간 또는 며칠인가 전에 이미 냉소랄까, 슬픔이랄까, 달무리 같은 것이 그것을 둘러싸고 그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지 않았니?' 삶이라는 책 속에서 추억은 마치 자외선처럼 본문의 난외에 예언으로서 적혀 있던 보이지 않는 글자를 각자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러한 것의 의도를 곡해해 아직 살지 않은 삶을 트럼프나 심령이나 별에게 인도해버려 결국 삶이 순식간에 탕진되고 오용된 후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돌아오게 만든다면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몸으로부터 온전히 자기 힘으로 능숙하게 운명과 겨루어 승리할 수 있는 힘을 속여서 빼앗아버린다면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순간은 그것 아래서 운명이 몸에 굴복해야 하는 '카우디움의 굴욕'이다. 미래의 위협을 충실한 '지금(Jetzt)'로 전환시키는 것, 이 유일하게 바람직한 텔레파시적 기적은 신체적인 임기응변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 바로 그러한 점에서 단식, 순결, 경야와 같은 고대로부터의 금욕의 고행이 예로부터 최고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매일 아침 우리 침대 위에 깨끗이 빨아놓은 셔츠처럼 하루가 놓여 있다. 이 비할 수 없이 섬세하고 촘촘한 직물, 이 순수한 예언의 직물은 우리 몸에 딱 맞는다. 이어질 24시간 동안의 운은 잠에서 깰 때 우리가 그것을 손에 쥘 수 있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