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자법은 글자를 모아 낱말을 만드는 체계다. 하지만 글자는 음성을 그대로 표기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이제 이런저런 글자가 늘 이런저런 음성을 표기한다고 할 수 없게 됐다. O U G H로 연결된 네 글자는 최소 일곱 가지로 발음된다. 다음 문장을 읽어보자. Though the tough cough and hiccough plough me through, my thought remains clear. 글자가 음성을 완성하는 합리적 수단이라는 기대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게 될 것이다."

-p.120


"인쇄를 위한 글자체 디자인은 이제 상업적 경쟁의 굴레에 빠져 정상이 아니다. 얼간이처럼 변형된 글자가 많이 생겼다. 나는 지금까지 다섯 가지 산세리프체를 디자인했다. 저마다 이전 것보다 굵고 뚱뚱하다. 광고가 사람들을 향해 소리치려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모양이 재미있는 수천가지 글자체가 개발됐다. 본문용 글자체도 너무 많다. 이는 모두 산업화 이전에 디자인된 것의 모방이나 재연, 재탕으로 일종의 타락한 결과물이다. 여기서 어떤 것도 오늘날 기계 생산을 위해 새로 디자인한 건 없다. 기계는 과거의 글자 모양을 재현하기 위해 점점 더 복잡해진다. 시곗바늘을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갔다는 사실과 우리가 여전히 고대 영국인인 척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글자는 시대의 산물이다. 철자법과 표음식 철자법, 모든 규칙은 설 자리가 없다. 오늘날 글자를 개선하는 유일한 길은 이를 없애는 것이다."

-p.129


"공장은 좋든 나쁘든 무척 다양한 잉크를 공급할 수 있다. 출판업자나 인쇄업자는 아마 수많은 기계 종이와 품질에 맞는 색소와 기름읠 화학적 성질을 연구하는 데 시간을 들일 것이다. 노동력을 절약하는 장비와 기계를 발명한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악마는 아마 이들 기차에 실린 발명품을 둘러싼 복잡함과 염려를 바라보며 미소 지을지 모른다. ¶ 이에 비해 (낭비를 피하는 절약은 제외하고) 굳이 노동력을 아끼려 애쓸 필요없는 수공예가의 삶은 단순하다. 자기 일에 쓰는 장비가 있지만, 이들에게는 종이나 활자, 잉크 등이 다양하지 않다. 그저 한 가지 종이나 활자, 직접 만든 두세 가지 잉크가 있을 뿐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복잡하고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으로 오히려 당황스러운 상황에 놓이기보다 이들의 개인적 감각이 훨씬 적절하고 유연할 수 있다. 규모가 큰 인쇄소에 일을 맡길 때 '검정'이라 하면, 이는 수없이 많은 색을 가리키므로 무의미한 말에 불과하다. 하지만 수공예가에게 '검정'은 단순히 그가 만든 '검정'이다. 물론 그에게 이 말은 많은 의미가 있다. 자기 손에 관해 아는 것만큼 자기가 만들어 쓰는 재료에 관해서도 많은 걸 알기 때문이다. 빨강이나 파랑 등 다른 색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당연히 그는 색을 능숙히 다룰 수 있다. 나무 병정 몇 명으로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아이에게 방바닥에 널린 가미지 백화점(Gamage's Emporium)납 병정 군대가 무의미한 것과 비슷하다.

¶ 그럼에도 일할 때 취향은 이유보다 덜 중요하다. 합리적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합리적 일은 좋은 일이다. 타이포그래피에서 색은 취향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p.91,92,93


"무엇보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진실로 즐거운 걸 발견하기 위해 서로 도와야한다."

-p.99


"그러면 염두에 둬야 할 건 독자가 책을 읽는 행위와 상황이다. 이것이 책 판형과 글자체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읽는지 말한다. 좋은 글자체는 어떤 책이든 잘 어울린다. 책 판형은 내용이 아니라 독자가 소설책처럼 손에 들고 읽는지, 역사책이나 지도책, 큰 도판을 넣은 책처럼 탁자에 놓고 읽는지, 악보처럼 독서대에 놓고 보는지, 휴대용 기도서나 여행 안내서처럼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읽는지 등에 따라 결정한다. (...) 책을 합리적으로 만드는 사람은 독자가 책을 읽는 행위와 상황에서 출발한다. 이것이 책 판형과 글자체를 결정하는 원칙이다. 다른 건 단지 결정에 영향을 주는 변수에 지나지 않는다. 책을 기획할 때는 먼저 누가, 어떤 환경에서 읽을지 고려해야 한다."

-p.108, 109


+

내가 좋아하는 것(유무형의 모든 것들)을 만든 사람이 궁금할 때가 있다. 과연 이것을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고도로 기능적이며 분화된 시대인 지금은 어떤 것을 사람 하나가 만들어내는 경우가 점점 드물어져서 저런 궁금증을 해결할 방법이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러니 이 책을 서가에서 발견했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Gill Sans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서체다. 이 서체를 만든 디자이너인 에릭 길의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생각이 담긴 책이지만, 사실 타이포그래피 그 자체에 대한 재치있는 이야기들 외에도 그 주변을 둘러싼 역사적인 문맥, 그리고 글자를 사용하는 인간이라는 대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더욱 흥미로운 글이다. 


이 글을 읽을 때는 시간이 많이 없었다. 좋아하는 페이지와 구절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것을 기록해 둘 타이밍을 다 놓쳐버리고 말았고, 그나마 표시를 해두었던 부분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