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55 - p.57


글을 쓰고 싶은 것과 글을 쓰는 것은 쥐며느리와 며느리의 차이다.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다. 하나는 기분이 삼삼해지는 일이고 하나는 몸이 축나는 일이다. 주변에 글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은데 정작 글 쓰는 사람은 별로 없다. 피곤하고 바쁘다며 '집필 유예'의 근거를 댄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말은 그 일이 우선이라는 뜻이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루에 한 잔 꼭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은 날이 새는 것도 모르고 게임을 한다. 돈과 시간을 들여도 아깝지 않고 그쪽으로만 생각이 쏠리고 영감이 솟고 일이 되게하는 쪽으로 에너지가 흐르는 것. 그게 무엇에 빠진 이들의 일반적인 증상이다.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수년간 영화를 한 편도 안 보는 사람은 없다. 글을 쓰고 싶은데 글을 수년간 한 편도 안 쓰는 사람은 주변에서 종종 본다. 글을 쓰고 싶은 것과 글을 쓰고 싶은 '기분'을 즐기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나는 일 년 전부터 직장을 다니면서 저녁이 되면 심신이 양초처럼 녹아버리는 증상을 경험했다. 책 한 장 집중이 어려웠고 글을 쓰려고 해도 머리가 개운하지 않으니 생각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몰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침에 30분 일찍 집에서 나와 사무실 근처 벤치나 카페에서 잠깐 책을 읽거나 필사를 했다. 점심시간에 책을 들고 나와 카페에서 한 시간씩 책을 읽다 들어갔다. 쓸쓸한 분투였다. 그것은 번다한 일상에 지친 마음을 닦아내는 의식 같은 것이자 활자와 최소한의 가느다란 끈이라도 쥐고 있고 싶은 안간힘이었다. 이 물질적 연결이 있을 때 언젠가 그 끈을 확 내 삶으로 당길 수가 있다. 나는 글이 쓰고 싶다는 이에게도 슬쩍 권한다. 하루는 책을 읽고 하루는 글을 쓰며 한 달을 해보라고. 그러면서 자기가 정말 글쓰기를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지켜보라고.


...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일단 쓸 것. 써야 쓴다.


...


아무리 보잘것없고 초라하게 느껴져도 자기 능력에서 출발하기. 



p.118


좋은 글은 질문한다. 선량한 시민, 좋은 엄마, 착한 학생이 되라고 말하기 전에 그 정의를 묻는다. 좋은 엄마는 누가 결정하는가, 누구의 입장에서 좋음인가, 가족의 화평인가, 한 여성의 행복인가. 때로 도덕은 가족, 학교 등 현실의 제도를 보호하는 값싼 장치에 불과하다. 일상의 평균치만을 관성적으로 고집하며 살아가는 순치된 개인을 길러낸다. 하지만 평균적인 삶도 정해진 도덕률도 없다. 천 개의 삶이 있다면 도덕도 천 개여야 한다. 자기의 좋음을 각자 질문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게 중요하다. 작가는 그것을 촉발해야한다. 삶에 존재하는 무수한 "차이를 보편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로부터 기존의 보편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글이 생명력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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