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데라다 도라히코 씨의 수필로, 고양이 꼬리에 얽힌 일을 쓴 것이 있는데, 고양이에게 저런 꼬리가 있는 것은 어떤 쓰임새 때문에 마련한 것인지는 모르겠고, 전혀 쓸모없는 물건처럼 보여서, 인간의 몸에 저런 거추장스런 물건이 붙어 있지 않은 것은 잘됐다고 쓰인 것을 읽은 적이 있지만, 나는 그와 반대로 나에게도 저런 편리한 물건이 있었더라면, 하고 생각하는 일이 여러 차례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고양이는 주인이 이름을 불렀을 때 야옹하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내키지 않으면, 묵묵히 살짝 꼬리의 끝을 흔들어 보이는 것이다. 툇마루 같은 데에 웅크리고서 앞다리를 가지런히 구부리고, 잠든 듯 잠들지 않은 듯 그런 표정을 짓고서, 꾸벅구벅 햇볕을 쬐며 졸고 있을 때에 시험 삼아 이름을 불러 보면, 사람이라면, 에이 시끄러워, 사람이 모처럼 기분 좋게 꾸벅꾸벅 잠들려는 참에, 자못 싫은 듯이 선대답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는 체하는 것이지만, 고양이는 반드시 그 중간의 방법을 취해 꼬리를 가지고 대답한다. 몸의 다른 부분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 동시에 귀를 꿈틀 움직여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휘두르지만, 귀를 움직이는 동작은 곧 거둔다 - 반쯤 감긴 눈을 살짝 뜨는 일조차 없이, 적요한 자세 그대로 의연히 움찔거리면서, 꼬리의 끝만을 가볍게 한두 번 살랑 흔들어 보이는 것이다. 한 번 더 부르면 또 살랑 흔든다. 집요하게 불러대면 대답이 없어지지만, 두세 차례 이 방법으로 답하는 것은 분명하다. 사람은 그 꼬리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고양이가 아직 잠들지 않은 사실을 아는 것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고양이 자신은 반쯤 잠들어 있고, 꼬리만이 반사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엇이 되었든지 그 꼬리를 가지고 하는 대답의 방법으로는 일조의 미묘한 표현이 깃들어 있어서, 소리를 내는 것은 귀찮지만 묵묵히 있는 것도 너무 무정하므로, 슬쩍 이런 방법으로 인사해 두자는 듯한, 그리고 또 불러 주는 것은 고맙지만 실은 자기는 자고 있으므로 참아 주지 않으시려오, 하는 듯한, 뺀들거리는 듯하나 붙임성 있는 복잡한 기분을 그 간단한 동작으로 매우 교묘하게 나타내는 것인데, 꼬리를 가지지 않은 인간으로서는 이런 경우가 생겨도 정말 이런 요령 있는 흉내는 낼 수 없다. 고양이에게 그런 섬세한 심리작용이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저 꼬리의 운동을 보면, 왠지 그런 표현을 하고 있는 듯이 생각되는 것이다. 


- 다니자키 준이치로, <손님을 싫어함('그늘에 대하여' 중)>






게다가 나는 요즈음 노령에 이르게 되자, 한층 예전의 고립주의를 강화시켜도 좋을 이유를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웬만큼 내가 교제를 싫어한다고 해도 육십 몇 년 사이에 상당히 지인이 늘어나 있고, 젊은 시절에 비한다면 벌써 현재에도 교제의 범위가 매우 넓어져 있는 것이다. 젋은 시절에는 한 사람이라도 많은 사람을 알고, 조금이라도 넓은 세상을 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나, 나의 경우는 이제 앞으로 몇 년을 살 수 있을 지도 모르고, 대체로 살아 있는 동안에 해야겠다고 생각한 일은 거의 계획이 잡혀 있는 것이다. 그 일의 양을 생각하자면 꽤 살아 있는 동안이라도 해치우지 못할 만큼이어서, 나로서는 자신의 여생을 걸고 그것을 조금씩 예정표에 따라 모조리 이루어내고 가는 것이 최우선이어서, 더 이상 사람을 안다든지 세상을 본다든지 할 필요는 거의 없다. 타인에 대해서 바라는 바는 다만 조금이라도 계획의 실행을 뒤틀리게 한다든지 참견한다든지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다이다. 나아가 이렇게 말하면 자못 공부하는 사람처럼 들리고, 촌음을 아껴서 시종 일에 열중하고 있는 듯이 들릴지도 모르지만, 실제는 그와 반대로 젊었을 때부터 남들에게 뒤떨어지는 느림보 필자였던 나는 늙으면 생기는 가지가지 생리적 장해 - 예를 들어 어깨가 굳는다든가, 눈이 피곤해진다든가, 신경통으로 팔이 아프다든가 하는 따위 - 가 몰려와서, 드디어 그 습성이 고질화되고, 원고지 한 매를 쓰는 데도, 그 사이에 마당을 산책한다든지 자리를 빙빙 돈다든지 하는 간주를 넣지 않으면, 근기가 이어지지 않아서, 일하는 중이라 해도 제대로 집필하는 시간은 비교적 적고, 우두커니 쉬는 쪽이 훨씬 많다. 결국 하루 가운데 여러 조건이 갖추어지고 순조롭게 설렁설렁 펜을 움직이는 시간은 겨우 얼마밖에 안 되는 것이기에, 그것분인데 불청객이 끼어들면 피해가 크게 된다. 정말 5분이나 3분이라도 좋으니 뵙고 싶다, 라면서 오는 사람이 있지만, 그 3분이든 5분 때문에 모처럼의 감흥이 중단된다면, 다시 서재에 돌아가더라도 바로는 기름이 타고 올라오지 못하기 때문에, 30분이나 40분은 훌쩍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고, 어쩌면 거기서 끊겨 쓸 수 없게 되어 버리는 때가 있으므로, 방해가 된다는 점에서는 시간의 길고 짧음은 크게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가능한 한 거래의 범위를 줄이고, 적어도 그 범위를 현재 이상으로 넓히지 않도록 하고, 새로운 지인을 가급적 만들지 않으려 하고 있다. 옛날에는 교제를 싫어한다 해도 미인만은 예외로, 아름다운 사람을 소개받는다든지 찾아온다든지 하는 일은 제한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조차도 좀체 고맙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 말하는 것은, 오늘이라도 미인이 좋다는 것에 변함은 없다 할지라도, 나이를 먹으면서는 미인에 대한 주문이 매우 성가셔져 있기 때문에, 보통 미인이라는 사람은 특히 오늘날 첨단적인 타입에 속하는 미인이라는 사람은, 나에게는 조금도 미인으로 비치지 않고, 도리어 악감정을 부르는 데 지나지 않는다. 나는 나대로 몰래 가인의 표준을 까다롭게 해 놓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부합할 만한 사람은 정말로 새벽하늘의 별 같으므로, 그런 사람이 쉽사리 출현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는다. 어쩌면 나는 오늘까지 알고 지내는 몇 사람 가인과의 사이에, 이후로도 교제를 이어 간다면 만족하고, 노후의 나의 인생은 거기서 충분히 아름답고, 그 이상의 자극은 바라지 않는 것이다. 


- 다니자키 준이치로, <손님을 싫어함('그늘에 대하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