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작가를 위한 다섯 개의 질문>(1991/1996)은 어떤가요? 그 작품에도 그런 사회적 책임과 예술에 대한 당시 생각이 반영되어 있는지요.


그런 부분도 있지만, 자화상이라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지요. 서울의 멀쩡한 직장을 때려치우고 예술을 하겠다고 독일로 갔는데, 독일의 미술대학에서 작업을 하면서도 내가 이 미술의 문으로들어갈 수 있을지, 정말 까마득하고 힘든 일로 느껴졌거든요. 문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삶이고 하나는 예술입니다. 삶의 문에는 손잡이가 없어서 열 수가 없고, 예술의 문에는 손잡이가 다섯 개나 있으니 고뇌를 할 수밖에 없죠. 그리고 삶과 예술 사이에 있는 중간 지점으로서의 공간, 내 정신의 작업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일까, 도대체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뭘까. 그것을 오브제를 통해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찾다 보니 그게 화분 속의 의자가 됐습니다. 무명작가가 이 방에서 하는 일은 결국 죽은 나무를 심고 계속 물을 주고 가꿔서 다시 자라게 하는, 그런 부조리하고 불가능한 일인 것이죠. 


<인터뷰 : 안규철, 김선정> 중에서 (p.98)



로댕갤러리 전시 때 <토스트 드로잉>도 함께 보여주셨죠?


'슬럼프 드로잉'(2003-4)이라는 제목으로 갤러리 한쪽 코너에 걸었습니다. 작가들은 누구나 종종 슬럼프를 경험하는데 그런 슬럼프가 왔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은지, 어떻게 그걸 극복할 수 있는지를 매뉴얼처럼 글로 썼고 그 실행 사례를 소개한 작업이었습니다. (중략) <먼지 드로잉-자화상>(2003-4)은 먼지로 그린 그림이지요. 제 얼굴 이미지를 양면테이프로 오려서 종이에 붙이고, 테이프의 비닐을 벗겨내면 끈적거리는 접착 면이 나오지요. 그 상태로 한두 달쯤 침대나 옷장 밑에 놓아두면 먼지가 들러붙어서 그림이 나타나는 거죠. 그 먼지는 자기 삶의 파편들이고, 살갗이거나 자기가 흘린 보푸라기이기도 하니까 완전히 자신의 삶 자체가 자화상으로 변하는 셈입니다. 이건 작가가 첫날 잠깐만 일하면 저절로 완성되는 작업이죠. 그래서 슬럼프에 빠져서 아무 작업도 못하는 작가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연작은 작가들의 허세에 대한 코멘트라고 할 수 있어요. 상당수의 작가들은 아이디어가 샘솟고 열정이 샘솟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그러나 실제로 들여다보면 자기 재능에 대한 의심으로 괴로워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신이 작가적으로 더 이상 가망이 없는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단 말이에요. 저 자신이 그렇죠. 그래서 이런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일종의 치유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터뷰 : 안규철, 김선정> 중에서 (p.113-114)





"이 모든 것이 질문들이고, 그 질문들이 결국 하나의 질문에서 비롯된다는 사실. '이것이 맞는가?' 또는 '이대로 좋은가?', '이것 아닌 다른 것은 없는가?' 이 질문은 대안, 다른 길,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고, '지금 여기'가 아닌 곳, 유토피아에 대한 질문이다. 부재하는 어떤 것을 상상하고, 형상으로 만들고, 사람들의 생각 속에 하나의 이야기가, 비어 있는 하나의 방이 생겨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예술이 더 무슨 일을 하겠는가? 잡담으로 채워진 세계에 침묵의 산책로를 내는 일, 상식이 통하지 않는, 매번 낯선 숲으로 통하는 문을 여는 일."


- p.325



"나는 나의 미술하는 삶을 덜 괴롭고 덜 고달픈 것으로 하기 위해 삶과 미술 사이의 벽을 깨겠다는 제스처를 취하지 않기로 한다. "내게 있어서 삶과 예술은 하나다"라고 용감하게 선언하는 상투화된 '진짜' 예술가들 사이에서 나는 차라리 그런 벽이 있음을 인정하는 '가짜'가 되겠다. 나는 그 벽을 맑게 닦아 거울이 되게 하는 일을 하기로, 그것이 세상에 대한 빚이라면 빚지고 살기로 작정한다. 내가 하는 일이 그림의 떡을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자각하기로 마음먹는다. 이것은 천재 예술가의 신화로 치장된 특권 의식이 아니다. 세상의 모습을 어떤 왜곡도 없이 훤히 비추어내는 거울을 닦는 일이 부끄러운 일이라면 나는 부끄럽게 살아야겠다. 이 벽은, 미술가로서의 내가 현실의 떡을 만들거나 거기 직접 한몫 거들지 못하는 한계인 동시에, 우리가 떡에만 머물지 않고 정말 꿈을 꿀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 <그림, 요리, 사냥> 중에서 (p.416)



"그것은 줄거리가 뻔한 영화처럼 재미없는 게임이 되었다. 누군가 미술가의 삶을 사냥터의 토끼의 역할에 비교했던 것을 기억한다. 경제든 정치든 사회든 미술비평이든 저널리즘이든 온갖 가능한 미술의 사냥꾼들로부터 토끼는 달아나야 한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면 토끼는 이내 붙들려버린다. 반대로 너무 깊은 굴속에 숨어버리면 사냥이 지속될 수가 없다고 그는 말했었다. 나는 오늘날 '나를 잡아주시오' 하고 아예 사냥꾼들을 찾아다니는 젊은 토끼들 틈에서 그처럼 쉽게 포획당해 버리고 순순히, 아니 기꺼이 방목장의 철책 속에 갇히는, 재미없는 토끼는 되고 싶지 않다. 또한 그 철책 속에 이미 들어 있는 채로 철책이 없다고 믿거나, 자신이 토끼가 아니라 호랑이가 되었다고 믿는 어리석은 토끼도 되고 싶지 않다. 동시에 미술의 깊은 동굴 속에 틀어박혀 세상과의 게임을 포기하는 소승적 구도의 토끼도 되고 싶지 않다. 쫓고 쫓기는 이 게임을 통해서만 나와 나의 사냥꾼들은 세상이라는 숲의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며 이름 없는 꽃과 나무와 골짜기들을 새로이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달아난다. 외람되지만

나를 잡아보라.


- <그림, 요리, 사냥> 중에서 (p.418)



"19세기 중반에 발표되어 당시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월스트리트'의 시스템에 수동적으로 저항하는 인물로 이해되었던 바틀비는 사실 출간 당시에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수도 없이 많은 필자들에 의해 새로운 해석이 더해지면서, '바틀비 산업'이라고 명명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특히 바틀비는 질 들뢰즈, 조르조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 등 현대의 정치철학을 주도하는 학자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앞서 언급한 것처럼, '노동'이 곧 '자유'로, 그리고 '자유'가 '착취'로 이어지는 후기 산업화 사회 자본주의의 체제에 전혀 새로운 종류의 저항과 변혁의 가능성을 제기한 인물로 떠올랐다.


들뢰즈는 바틀비가 반복해서 구사하는 어구, "저는 ...... 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는, 문법적으로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통상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낯선 언어라는 점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했다. 바틀비의 상용구는 긍정도 부정도 아니면서 무엇을 선호하고 무엇을 선호하지 않는지를 제시하지 않은 채 다만 모든 행위의 (불)가능성을 유예의 상태로 남겨놓기만 하기 때문에 파괴적이라고 지적했다. 소설 속에서 변호사는 바틀비의 이러한 태도 뒤에 어떤 의도가 있는지 혹은 그의 '비정상적 상태'에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유추하고 이해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의도'와 '이유'를 상정하는 논리와 상식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난 바틀비의 고요한 언행은 그의 사무실을 마비 상태로 몰고 간다.


하트와 네그리는 <제국(Empire)>에서 이러한 바틀비의 "수동적이고 절대적인 거절"이 체제를 무력화하는 정치적인 힘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현대사회의 규범이 된 생산과 노동의 의무를 거부하는 바틀비의 절대성과 단순성이 기존 사회가 개인들을 분류하는 체계 자체를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주권적 권력을 전복"하지만, 거부 자체만으로는 "사회적 자살"에 이르는 것에 그칠 것이라고 보았다. "거절의 정치학"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거부를 초월하여, 혹은 거부의 일환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하트와 네그리가 대안적 정치를 위한 시발점으로서 바틀비의 '거부'를 제안했다면, 아감벤은 <바틀비, 혹은 조건성에 대하여(Bartleby, or on contingency)>에서, 하트와 네그리식의 '대안' 혹은 '정치학'의 의미 자체를 재고하는 방편으로, 바틀비의 (비)논리를 "잠재성(potentiality)"개념에 의거하여 설명했다. 잠재성에는 "존재하거나 무엇을 실행할 잠재성"도 있지만, "존재하지 않고, 실행하지도 않을 잠재성"이 있다. 그러나 잠재적인 어떤 것이 존재하거나 실행되면, 그 순간 그것은 현실이 되어 사라진다. 따라서 아감벤은 잠재성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실행되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는 상태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지젝은 이러한 아감벤의 "비실천적 잠재성"논의에 주목하면서, 바틀비의 거부를 "무능한 행위로의 이행"이라고 정의했다. 무위, 혹은 실천하지 않는 무능한 행위가 바로 "우리가, 그것이 부정하는 것에 기생하는 '저항' 혹은 '항의'의 정치학으로부터 헤게모니적 위치 그리고 그 부정 밖의 새로운 공간을 여는 정치학으로 이행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젝은 바틀비식의 거부를 새로운 대안적 질서라는 다음 단계로 완성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규정한 하트와 네그리의 정치학에 반해, 부정 혹은 거부의 상태가 지속적으로 지탱되기 위한 "근본적인 원리"로 제시한 것이다.


안규철은 이미 "그것이 부정하는 것에 기생하는 '저항' 혹은 '항의'의 정치학"을 경험했다. (중략) 그가 주장했던 "외곽"이란 더 이상 거대한 혁명을 소망하지 않고, 거룩한 구원을 기다리지 않으며,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저항의 "잠재력"을 유지할 수 있는, 현실로부터의 반성적 거리를 둔 장소다.


(중략)


구원의 희망은 사라졌고, 남은 것은 보잘것없는 인생뿐인데, 그런데도 반전을 기다리지 않고, 메시아를 포기한 채, 현재를 받아들이면, "어떻게 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야 하는 일상은 진부하고 사소한 것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구원'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나면, 그 압도적으로 지루한 일상에 산재한, 진부하기 짝이 없는 사물들이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고 때로는 심지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다. 안규철의 작업은 바로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상과 초라한 현존을 성실하게 필사한 결과물이다."


<안규철, 세상에 대한 골똘한 관찰자(우정아)> 중에서 (p.49 - p.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