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키치란 무엇인가'에는 디자인과 키치 사이의 긴장이 남아있다. 그에 비하면 한국 사회에서 키치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모든 것이 키치여서 사실상 디자인과 키치 사이에 최소한의 긴장도 존재하지 않는 한국 사회 말이다. 물론 한국 사회에도 디자인이 없지는 않다. 그것을 어떻게 규정하든, 어디에서 온 것이든 간에 한국 사회에도 디자인이 있다. 그러나 한국의 디자인에는 키치와의 대립이나 긴장감이 없다. 그것은 디자인이라기보다는 사실상 키치의 일종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설사 디자인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키치의 대양 위에 떠 있는 몇 방울의 기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키치에 대해서 물어볼 디자인이 없다. 모두가 노력 없는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에서는 아무도 진실을 묻지 않기 때문이다.


- 최범, <그때 그 책을 읽었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