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돌아가면, 당신에게는 대화할 의무가 없습니다. 아무리 상대가 나름의 성의를 보인다고 해도 원치 않으면 대화를 거절할 수 있다는 건 저도 얼마 전에 알았습니다. 그런데 '네가 나를 무시해?'가 요즘 너무 자주 들립니다. 약자의 어쩔 수 없는 호의가 이미 의무가 되어, 나의 선택이 의사표시가 아닌 의무 불이행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나를 침해하지 말라는 선언은 무시가 아닙니다. 상대가 무례하다면, 당연히 거절할 자유가 있습니다. 상대가 무례하지 않았던들, 대화에 응할지는 당신의 의사와 여력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선택할 수 있습니다. 대화 중에 상대가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한들, 당신이 감동하지 않은 한 굳이 감동을 표해주지 않아도 됩니다. 대화에서 상대의 주장이 미흡했다면, 당연히 그 주장을 인정해주지 않아도 됩니다. 상대가 구애를 열심히 했다고 사귀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상대가 보기 드물게 착한 청년이라고 해서 그것만으로 상대를 받아줄 이유는 없습니다. 사귄다고 해도 스킨십을 거절할 자유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결혼 상대가 엉망진창으로 행동하다 모처럼 개심을 했던들, 결혼관계를 얼마든지 박차고 나와도 됩니다. 모든 비난은 오랫동안 관계를 망쳐온 쪽에 쏟아져야 마땅합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여자들이 '받아주지 않았다', '친절하게 대하지 않았다', '나를 떠났다'와 같은 이유로 자신이 받아야 할 비난을 여자들에게 돌려왔습니다. 이들은 이제 비난에서 좀 덜 자유로워도 됩니다.


당신이 돌연, "나는 당신과 대화할 의무가 없고, 대화하지 않기로 선택할 수 있다"고 분연히 일어나면, 그건 너무 당연한 말이기 때문에 '누가 뭐래?'라는 반응이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실제로 상대가 우리에게 기대한 바를 선택해주지 않았을 때 우리는 '나쁜 년'이라 비난받고, 심하면 죽습니다. 여성을 죽이는 이유 중에 '나의 구애를 받아주지 않아서'나 '나를 무시해서'가 들어 있는 건 실제 그들이 여성을 선택의 주체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이렇게나 단호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건 좋은 게 좋은 건데 괜한 짓을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이해와 인내와 배려라는 게 너무나 당연하게 한쪽에 부과되어 있어서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아예 없거나, 온전한 나의 호의로 인내하기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당연하게 치부될 뿐인 현재의 불균형을 더 이상 참고 넘어가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당신은 우선 당신에 대한 예의를 갖추지 않은 상대와는 대화를 정확히 거절할 자유를 확보해야 합니다. 자연히 확보되지 않으니 연습을 해야 합니다."